정준호의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영국 대학의 첨단 실험실에서 기생충학을 공부하던 ‘정준호’님이 어느 날 의료봉사단을 따라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오늘날[2026년 현재]의 ‘에스와티니’ - 옮긴이 '마음을 지키는 사람'. 아래 ‘옮긴이’)로 날아갔습니다. 실험실을 벗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든 그가 아프리카에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전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과 의학의 모습을 아프리카의 시선으로 낯설게 다시 바라봅니다.
[연재] 빈국의 기생충에 남은 제국 식민지배의 잔재 (0)
- 글쓴이 : 정준호 l 글 쓴 날짜 : 2010.08.24
-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6)
*식민지와 기생충
▶ 총, 균, 쇠의 제국주의, 가장 강력했던 것은 균
한때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던 나라에서 태어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에서 십 년을 공부하고, 이제 도착한 나라가 불과 몇십 년 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라니, 인연이 참 묘하기도 하고, 영국의 영향력이 참 컸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스와질랜드(오늘날의 에스와티니.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나라다 – 옮긴이)가 영국에서 실제로 독립한 것은 1968년으로, 벌써 40년가량 되었지만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잔재는 많이 남아있다. 사소하게는 초콜렛 브랜드부터 자동차 운전대의 방향, 도로 표지판 같은 것들, 그리고 현행 헌법까지 영국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스와질랜드는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인구밀도가 낮은 데다, 천연자원이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니라는 특성 때문에 그리 극심한 수탈을 당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아공(‘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줄인 이름 – 옮긴이)처럼 백인의 경우에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지지고 있거나, 상대적으로 나은 대접을 받는 것 같은 불균형은 아직도 뿌리 깊이 남아 있다.
흔히 ‘식민지배’라 하면 자원 수탈, 강제 징용, 억압적 지배, 문화 말살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식민지 잔재라하면 친일파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식민지가 남긴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기생충이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너무도 짙어 이것이 식민지의 잔재임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정도로 소외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그림자의 근원은 코르테즈가 거대한 아즈텍 제국(올바른 이름은 ‘메히까’ 제국. ‘아즈텍’은 유럽인들이 19세기에 메히까 제국에 갖다붙인 이름이다 – 옮긴이)을 무너뜨리는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 』에서 주장했다시피, 총, 균, 쇠 중(가운데 – 옮긴이) 인류 문명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것은 바로 균이었다.
그렇게 당시 유럽의 침입자들과 함께 남아메리카로 유입된 천연두와 홍역은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의 상당수를 몰살시켰다. 인구가 급감한 탓에 새로이 확장된 남아메리카 식민지에는 심각한 노동력의 공백이 심했고, 노동력을 수혈하기 위해 많은 아프리카인들(서아프리카 내륙 국가의 사람들 – 옮긴이)이 남아메리카로 끌려왔다. 그리고 이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제국들의 팽창이 극에 달하고 노예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대륙 간의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나면서 그 사람들의 몸 속에 있던 기생충도 노예무역선에 밀항해 새로운 대륙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 강변사상충 확산으로 본 제국 수탈의 역사와 흔적
이 시기에 유입된 가장 대표적인 기생충 질환은 바로 강변사상충증(Onchocerciasis)이다. 강변사상충증은 사상충(Onchocerca volvulus)에 일어나는 질환으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과 더불어 유충이 각막과 망막을 손상시키며 시력 상실을 유발한다. 이 때문에 강변실명증(River blindness)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1590년대부터 해마다 수천 명의 서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이 베네수엘라나 콜롬비아의 금광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서아프리카는 강변사상충이 가장 심하게 유행하는 지역이었고, 남아메리카의 사금 채취 지역은 사상충을 옮기는 먹파리들이 이미 널리 서식하는 지역이었다. 불행히도 이 두 조건은 궁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 남아메리카 먹파리들이 강변사상충을 무리 없이 매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금새 강변사상충증이 지역에 토착화했다.
기생충의 침입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노예무역이 비교적 줄어든 19세기에 다시 한번 강변사상충이 찾아왔다.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남부를 침공하면서 식민지인 수단에서 군대를 징집해 지원병으로 파견한 것이다. 수단 역시 강변사상충이 유행하던 지역이었다. 이렇게 유입된 강변사상충은 멕시코부터 브라질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퍼져, 강변실명증은 심각한 보건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과테말라 일대에서 생산되는 마운틴 블랜드 커피들이 이런 강변사상충을 악화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 이 커피들은 과테말라의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데, 근처 계곡에는 사상충을 옮기는 먹파리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 적극적인 방제 노력이 있기 전까지, 커피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강변사상충에 시달려 영원히 빛을 잃어야 했다.
사상충 중 하나인 만소넬라사상충(Mansonella penetran)도 역시 이렇게 전해진 기생충 중 하나다. 현재 중서부 아프리카 일대와 중남아메리카(중남미 – 옮긴이) 일대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눈에 띄는 임상증상이 일어나지 않아 지금까지 제대로된 유병률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하지만 최근 관절통이나 근육통, 가려움증, 만성피로처럼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다양한 증상들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새로이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사상충증 치료에 쓰이는 대부분의 약물이 만소넬라사상충에는 효과가 없고, 그 피해 규모도 집계되지 않고 있어 ‘소외 열대질환’ 중에서도 가장 소외받고 있는 질환에 속한다. 또 최근에는 에이치아이브이(HIV)의 임상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추가 연구가 절실한 실정이다.
노예무역을 통해 전파된 기생충이 지금 현재까지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사상충증 뿐이 아니다. 주혈흡충(Schistosomiasis)도 역시 식민지의 잔재다. 중앙아프리카 일대에서 주혈흡충은 가장 흔한 기생충 질환 중 하나였다. 불행히도 강변사상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아메리카에도 주혈흡충을 매개할 수 있는 달팽이가 서식하고 있었다. 금새 브라질 인근에 자리를 튼 주혈흡충은 지금까지도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다. 특히 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 기생충에 가장 자주, 그리고 심하게 노출되기 때문에 빈곤을 심화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충이나 다른 사상충증 역시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로 전파되었다.
이런 질환들은 단기간에 눈에 띄는 사망률이나 임상 증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꾸준히 힘을 소진시키고 몸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피해는 오히려 다른 감염성 질환에 비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런 열대질환들은 이제 남아메리카에서 삶의 질을 저하하고 빈곤을 가중하는 주요 원인들이 되고 있다.
▶ 남아메라카의 골칫거리 말라리아, 노예무역선 타고 퍼지기 시작
말라리아의 전파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혹독한 빙하기, 인류가 베링해협을 건너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말라리아가 함께 넘어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런 환경에서 모기가 성공적으로 말라리아를 꾸준히 전파하기는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역사기록들을 보면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에도 아즈텍(메히까 – 옮긴이)이나 잉카(올바른 이름은 ‘타완틴수요’. ‘네 방향의 땅’이라는 뜻이다. ‘잉카’는 타완틴수요 제국의 황제를 부르던 말이다 – 옮긴이), 마야에는 소규모의 말라리아 유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놀라운 항해술을 지니고 있던 폴리네시아인들이나 북유럽인(바이킹 : 옮긴이)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이 당시에 유행하던 말라리아는 치명적인 증상을 유발하는 열대열 말라리아(Plasmodium falciparum)가 아니라 비교적 증상이 경미한 삼일열 말라리아를 비롯한 다른 말라리아였다.
말라리아 중에서도 사망에 이를 정도로 심한 증상이 나타나는 열대열 말라리아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은 노예무역이 본격화하면서다. 또한 다른 지역의 열대열 말라리아와 남아메리카의 열대열 말라리아의 유전적 차이를 고려해보면, 16세기 무렵에 아메리카에 들어왔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즉 말라리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심각한 보건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는 식민지배 당시에 남아메리카의 열대우림을 무차별로 개간하여 플랜테이션 농장을 세우는 과정에서 말라리아 매개 모기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탓도 있다. 이후로 말라리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토착화해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만 명의 감염자를 발생시키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치명적인 말라리아는 식민지배에 의해 아메리카에 들어왔지만, 17세기 이후 전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을 말라리아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키니네(quinine)의 원산지가 바로 남아메리카라는 사실이다.
20세기에 합성 항말라리아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유일한 말라리아 치료제였던 키니네는 기나나무(Cinchona)의 껍질에서 추출했다. 열대지역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식민지 확장 전쟁에서 말라리아 치료제의 확보는 군수물자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기나나무는 닥치는 대로 껍질이 벗겨져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열강들은 이미 묘목을 반출해 인도 등지에서 거대한 기나나무 플란테이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꾸준히 사용해오던 치료제마저 빼앗긴채 말라리아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야 했다.
▶ 21세기의 우리는 지금 제국주의 그늘에서 벗어났나?
한국도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당시에 이런 영향을 어느정도 받았을지도 모른다. 1920~3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주혈흡충이 유행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일본 주혈흡충을 매개할 수 있는 달팽이가 없어 주혈흡충이 한국까지 전파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으로 강제징용 당한 사람들(노예노동을 강요당한 사람들 – 옮긴이)은 현지에서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안전하고 깨끗한 식수에 접근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일본 주혈흡충은 다른 주혈흡충만큼 발암 연관성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간암 등의 발병 확률이 어느 정도 상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과연 강제징용(노예노동 – 옮긴이) 당시 주혈흡충에 감염되었다가 치료받지 못한 분들은 얼마나 되며, 또 감염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암의 위험을 안고 살아왔을지에 관해 정확한 집계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특히 앞에서 말했다시피, 기생충 질환은 감염 초기 급성단계가 지나가면 명확한 임상증상 없이 감염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강제징용 당시의 과도한 노동이나 착취로 인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간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제국주의의 팽창은 기생충학에서는 참으로 양면적인 존재다. 만약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기생충학은 지금만큼 발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제국이 팽창하면서 자국 파견원들의 신변이 기생충 질환으로 위협받자 국가 차원의 적극 투자가 이루어져 비로소 기생충학은 황금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제국이 팽창하면서 식민지 곳곳으로 본래 존재하지 않던 기생충들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뿌린 씨앗으로 식민지의 빈곤과 질병이 자라나는 것을 본 과학자들은, 마치 제국의 과거가 그러했듯이, 계몽과 개발이 근본적인 해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 없는 일방적인 개발과 계몽은 지난 글(“산골 마을 수자원공사”)에서도 잠시 말했다시피, 오히려 역효과만 낳았을 뿐이다.
이해 없는 계몽은 전통과 문화, 역사를 파괴했고, 이해 없는 개발은 오히려 질병의 전파를 악화시키고 환경을 파괴했을 뿐이다. 이렇게 지난 수십년간 기생충을 박멸하기 위해 주민들을 ‘계몽’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적, 생태적 파괴들이 자행되었다. 식민지배의 악몽이 걷히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들을 데이터나 숫자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생각하며 연구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올해(2010년 - 옮긴이)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다. 지난 100년 간의 굴곡을 돌아보는 일도 좋지만, 과연 지난 100년간의 굴곡이 현재 우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지금 우리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과연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출처 : http://scienceon.hani.co.kr/blog/archives/10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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