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 농민 몰락과 로마의 대(對) 농민 정책

마음을 지키는 사람 2026. 1. 16. 19:02

(내가 대학원생 시절 - 그러니까 열아홉 해 전 - 에 썼던 글을 일부를 고쳐서 지금 이곳에 올린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이 로마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빈다 : '마음을 지키는 사람')

 

 

3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 농민 몰락

 

기원전 146, 로마는 제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긴 뒤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 머루르고 있던 로마가 전쟁이 끝난 지 채 50년도 못되어 로마가 에스파냐와 소()아시아(터키[오늘날의 튀르키예]), 그리스(헬라스), 발칸 반도, (이집트를 제외한) ()아프리카 해안지대를 새 속주(屬州)로 얻은 사실로도 이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로마가 군사력에 의해 국력을 충실하게 해 감에 따라 정치 사회문제가 표면화하였다. 이는 오랜 전쟁이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농민들은 오랫동안 군대에 복무하느라 농사를 짓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져야 했으며, 결국 땅을 빚쟁이에게 넘겨주고 도시(주로 로마)로 가서 새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공유지는 장기 임대용이었으므로 거기서는 수익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분배되는 땅이 워낙 넓고 비싸서 가난한 농부들로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이와 병행하여 자본 농업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대농장제도인 라티푼디아가 나타났다. 플리니우스(Plinius)가 그의 박물지 에서 대토지 라티푼디아가 오래 전에 이탈리아를 파멸시켰다고 말하고 있듯이, 노예노동에 의존하여, 포도나 올리브 등의 상품 작물을 값싸게 대량으로 재배하는 새로운 라티푼디아는 경제적으로는, (가격으로나 수량으로나 대 농장의 농산물과는 경쟁할 수 없는) 독립적 소농들의 숫자를 감소시키고, 이들을 소작인과 노예들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보호자 예속제도를 파괴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회의 핵심을 이루었던 자유 신분의 중소농은 사라지고 토지 없는 빈민층이 생기고 부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빚에 시달리고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가난하고 그들을 위해 나눠줄 새 식민지는 부족했기 때문에 고용되지 못한 농민들 대다수는 로마로 밀려들어 자선에 기대거나 임시 일거리, 정치인의 심부름 따위를 해 주면서 먹고살았다.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누스의 원전대로라면, 이들, 그러니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운 로마 시민들은 한 뼘의 토지도 없이 처자식과 더불어 집없는 부랑자로 굴러떨어졌고, ’빈곤과 조세와 군복무에 짓눌려그 수와 힘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시민들은 결혼을 아예 기피하여 독신으로 지내거나,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피임과 영아의 살해 내지 유기를 통해 빈곤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플리니우스는 라티푼디아가 이탈리아를 망쳤다느니, 막스 베버는 그것이 국가적 경제형태였다고 극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입각한 연구결과들은, 비록 'Land nearer Rome'이 주로 노예들이 투입된 라티푼디아로 변했다 하더라도, 자급자족의 중소 자영농민들의 중소토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 대체로 大農場小農場共存하고 있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로마 인근지역의 몰락한 농민들의 일부가 그들의 보금자리를 떠나 도시 로마로 몰려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로마 시()는 기원전 2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각종의 공공토목건축사업으로 인한 공사 때문에, 로마로 유입된 인구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큰 지장은 없었다. 더욱이 기원전 140년대 후반에는 경제가 호황을 누렸다. 로마가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코린트를 멸망시키자 막대한 전리품과 금은보화, 그리고 노예가 로마 시중에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각종 공사가 벌어져 많은 자금이 시중으로 흘러 나가게 됨으로써 로마시는 흥청망청 호황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기원전 130년대에 들어서면 사정은 확 달라진다. 전쟁의 부재(不在)내지 소규모의 전쟁으로 인한 손실은, 로마에 부를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한 경제불황을 몰고 왔다. 게다가 실업, 식민사업의 중단, 정치 사회적 불안, 과잉인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곡물부족으로 인한 곡가의 폭등 등 최악의 사태가 닥쳐왔던 것이다.

 

기원전 130년대와 120년대, 그러니까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시대에는 로마 시민들의 화제(話題)가 곡물 가격의 폭등이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이헬하임(Fritz M, Heichelheim)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원전 140년과 기원전 137년간에 지중해 지역에 경제적 파국시대가 도래하여 점차 심화되었으니, 기원전 120년경에 가서야 비로소 끝났던 이 현상은 아마 미증유의 연속적으로 닥쳐 든 흉작들로 야기되었을 것이다.

 

늦어도 기원전 138년 이후부터는 곡가가 기원전 140년에 비해 500%나 양등하였고, 그 후 수년간 더욱더 악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및 노예의 수많은 봉기는 로마에 있어서 그락쿠스 시대의 불안을 확대시키고 강렬하게 했던 이러한 상태의 결과들이었다.

 

또한 노예들의 가격도 당시에는 더 비싸졌고, 다른 많은 생산물의 값도 그러했으리라. 기원전 127년은 기원전 140년에 비해 물경 1,200%까지 곡가가 올랐으니 말이다! 원로원이 바로 이 해에 로마에서의 혁명적인 여러 가지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가이우스 그락쿠스를 사르디니아 섬으로 보낸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121~20년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뚜렷한 물가의 하락현상을 볼 수가 있는데, 이 해에 가이우스 그락쿠스가 다수의 지지세력을 상실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로마시에 전반적인 물가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기원전 140년에 비해 2년 후인 기원전 138년에는 곡가가 5배로 올랐고, 13년 후인 기원전 127년에는 그것이 무려 12배로 솟구쳐 뛰었다. 이러한 사실은 임금이 아무리 오른다 하더라도 물가의 앙등에 비할 바가 못 되므로, 분명 곡물위기로 빚어진 비참한 사태는 실상 그 극에 달했을 것이다. 당시 을 구할 수 없었던 로마시민들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로마에 당장 실제로 굶어 죽을 위험이 닥쳐왔을 것이다. 사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의 도시 집중으로 로마는 파산에 이를 지경이 된 것이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프롤레스, 자식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무산자를 의미)라고 불리는 도시 일당 노동자 계급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의 숙박은 비참하였고, 하루 동안에도 굶어 죽거나, 폭동을 일으키거나, 급기야는 군인정치가들의 사병으로 고용되었다.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유명한 연설이 그들의 상황을 대변해 준다.

 

"이탈리아를 떠도는 야수들도 ...자기의 굴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쉬고 몸을 의지할 곳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고 죽은 사람 등이 가진 것이란 공기와 햇빛밖에 없고, 집도 가정도 없이 처자들과 헤맨다. 그들의 사령관들은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분묘와 신전을 적으로부터 수호하도록 감언이설로 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남들의 재부와 사치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우다 죽으며...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뼘의 땅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몰락하던 중소 자영농과는 달리, 이 전쟁으로 재미를 보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실업가 계층이 바로 그들이며, 정치적으로는 원로원 계층이었다.

 

실업가요 화폐자본가 계층은 "기사(eques, 복수형 equites)"라고 불리워졌는데, 이들은 로마군의 기병대와 같은 등급이 매겨질 만한, 혹은 이들 기병들을 보조할 만한 충분한 재산인 40만 세스테리우스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은 은행업, 징세 청부업, 고리대금업, 군함과 수송선의 건조 등에 종사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었으며, 대규모 전쟁, 식민지의 확장, 대규모 건축 계획 등은 모두 이들의 등장을 부추키는 요인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신흥 귀족(Nobiles)계층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1세기에는 이전의 자영농민을 핵심으로 한 공화정이 붕괴하고, 두 특권 계층인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층에 의한 지배의 새로운 귀족정체가 형성되는 전환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가 바로 그락쿠스 형제이다. 그락쿠스 형제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노빌레스의 희생을 무릅쓰고 몰락 자영농민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락쿠스 형제가 이런 개혁 조치를 밀고 나갔던 까닭은, 이 문제가 국가의 근간에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마 군단의 중핵인 소()농민의 몰락은 곧 국방력의 저하와 직결되었다. 게다가 제국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노예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고, 속주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군사력이 필요했다. 실제로 기원전 135년에는 시칠리아에서 노예의 대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거기에는 무력진압밖에는 해결방법이 없었다. 역시 군사력 강화가 관건이었다) 공화국은 제국의 지배체제 유지를 위하여 대()개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개혁

 

그락쿠스 형제 중 형인 티베리우스 그락쿠스는 출세 코스의 첫 관문인 재무관으로서 임지 히스파니아(에스파냐)의 누만티아로 가던 도중 이탈리아 반도의 에트루리아를 통과할 무렵, 그곳에 이탈리아 농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외국인 노예들만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이윽고 호민관에 당선되어 개혁에 착수한다.

 

서기전 133, 그는 500유게라(125헥타르) 이상의 공유지를 소유한 사람은 초과한 부분을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는 토지개혁법을 내놓았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 시민은 누구든지 공유지(公有地. ager publicus)500 유게라(iugera) 이상 소유할 수 없다. , 성년 아들이 1인이나 2인 이상 있을 시에는 250 ~ 500 유게라를 더 소유할 수 있다.

 

둘째, 토지소유상한선을 초과하는 토지는 전부 몰수하여 토지 없는 로마시민이나 동맹국 시민들에게 추첨으로 각각 30 유게라씩 분배한다. , 이 경우 매도는 불가하며, 매년 일정한 농지세를 국가에 바쳐야 한다.

 

셋째, 이 법을 시행하기 위해 농지분배3인위원회를 구성한다.

 

흔히, 이 법의 기본내용은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 섹스티우스법의 부활로 설명해 왔으나, 티빌레티 등 이탈리아 출신 史家들의 연구결과, 기원전 167년 이전에 새로 제정된 또다른 농지규모에 관한 법의 부활로 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학계 현황이다.

 

어쨌든 이 법은 거의가 대지주인 원로원 의원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고, 원로원 의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반발도 심했다. 토지가 수세대 동안 점유되어 온 탓으로 유산상속이나 매매에 의하여 국유지와 사유지의 구별이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개혁 반대파는 티베리우스의 동료 호민관인 옥타비아누스를 움직여 거부권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그 동료를 민회의 결의로 파면한 뒤 농지법을 성립시키고 만다. 티베리우스는 또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이듬해의 호민관 선거에도 입후보하기로 했다.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은 명백히 공화정의 규칙 위반이었다. 두 명 중 한 명이 동료의 폭주를 감시하고, 특정 정치가의 재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공화정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국가의 제도를 무시하고 민회의 결의라는 민주정적 수단으로 1인독재를 꾀하고 있다. 그는 로마의 이 되고자 한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개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양식 있는 사람들도 민회의 결의를 배경 삼아 국가의 제도를 바꾸려 한다는, 이른바 수단의 혁명적 성격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결국 민회장에 난립한 원로원 의원에 의하여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원로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법안을 철회해 버렸다. 이로써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사가(史家 : 역사가)들의 평가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에 그락쿠스가 이 법을 제정하게 된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우선, 로마시민과 동맹국 시민들의 수적 감소로 인해 로마 군사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그락쿠스는 농지분배를 통해 로마 인력의 수적 증가를 노렸다는 아피아누스의 해석이 있다. 그러나 로마 인력의 부족은 실제 현상이 아니었고, 그것은 다만 부족했을 것이라는 史家들의 상상에 기인하는 것이었다는 견해들이 요즈음 속속 나오고 있다.

 

현대 史家들 중에는 도시 로마의 사회적 빈궁이나 도시 인구의 만연된 실업을 구제하기 위해, 그락쿠스가 채택한 수단이 바로 농지법이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 경제대공황 시절의 사회경제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보렌교수가 기원전 2세기 전반기와 특히 기원전 140년대의 호경기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기원전 130년대의 도시 로마가 과잉인구, 실업,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불경기와 이에 겹친 곡물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서, 그락쿠스가 실업자를 소농장들에 정착시킴으로써 초만원의 도시와 실업자를 구제한다는 근본의도하에 농지개혁을 실시했던 것이라는 매우 주목할만한 논지를 전개했는데, 이는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그락쿠스는 도시의 가장 심각했던 곡물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지는 않고 단지 농지분배라는 하나의 안이한 해결책을 추구했을 뿐이라고, 자못 비판의 자세마저 취했던 것은 잘못이다. 그락쿠스는 농지개혁을 통해 도시 로마의 곡물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그는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것이다.

 

티빌레티와 가바 등 이탈리아 출신 史家들은 거의 한결같이 원거리에는 분배에 이용할 토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시민들을 ‘Land nearer Rome(로마 시에 더 가까운 땅 - 마음을 지키는 사람)'에 정착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던 그락쿠스가 지닌 원래의 이념, 바로 그것 때문에 정치위기가 야기되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시민들을 정착시킨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귀족들의 라티푼디아 몰수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그락쿠스가 'Land nearer Rome'을 예전의 곡물밭으로 환원하여 도시 로마의 곡물공급지로 만들려 했던 그의 확고한 결의의 표시였다고 생각된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직에 재선되는 작업을 진행하다가 원로원의 반발을 받아 싸우던 끝에 타살되었다. 그로부터 10년후 동생 가이우스는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에 올라 형의 개혁작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기원전 122년에 호민관직을 연임하였으며, 기원전 121년에 삼선을 획책하다가 반대에 부딪쳐 싸우던 끝에 타살되거나 자살하였다고 한다.

 

먼저 티베리우스의 개혁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토지소유의 제한을 들 수 있다. 이는 공유지에 대해 시민 한 사람 당 500유게라로 한정하고 자녀 2인까지에 한해 한 사람 당 250유게라씩 더 인정을 하여 한 집안 전체 소유지가 1000유게라를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런 토지개혁을 위해 '토지 재분배 위원' 3인을 임명하였다. 그 결과 개혁안을 둘러싸고 그락쿠스는 원로원 귀족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동생인 가이우스는 형의 토지개혁이 심한 반발로 실패한 점을 감안하여 우선 토지개혁을 보류하고 그 대신 곡물법을 시행하였다. 이는 어려운 토지 개혁 대신 로마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국가에서 아주 염가로 곡물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원로원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착취취체법'에 따르는 재판권 등 원로원의 권한을 기사들에게 이양하였다. 그뿐 아니라 곡물 창고, 도로, 교량 등 대토목 공사를 실시함으로써 로마 빈민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나아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카르타고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여 토지없는 시민들을 식민하였다. 또 그는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민권법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원로원과 부유층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곡식이 염가 배급에 이어 마침내 거의 무상으로 로마의 가난한 시민들에게 지급하는 정책으로 인해 가이우스는 동조자와 함께 많은 적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원로원 계층은 가난한 무산자들이 국가의 정책에 기생하여 로마 시내에 빈들거리며 민회에서 정책을 죄우하는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은 대토지 소유와 원로원 중심의 정치체제에 반발하고 시민단과 민회 중심의 전통적 정치체제의 부활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락쿠스 형제 개혁의 실패로 토지 겸병은 가속화하고 빈부 격차는 심화되었으며 원로원 중심의 정치체제가 더욱 발달하였다. 그후 원로원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적 분쟁은 기사출신의 군인 정치가요 평민파인 Marius와 원로원의 벌족 Sulla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고 민회 중심의 로마 공화정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하였다.